무사(武士)의 유래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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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성묵 논설위원
기사입력 2015-02-05 [19:11]


▲임성묵 논설위원/본국검예 저자 © 무예신문

‘무사’와 ‘협객’은 무도(武道)를 수련하는 사람들에게는 친숙한 용어다. 무사(武士)와 문사(文士)의 개념이 언제 부터 유래되었으며 중국의 무협(武俠)은 언제부터 나타났는지 간략하게 정리하여 소개한다.
 
‘사(士)’는 수 천 년 동안 동양사회를 유지한 사회집단이다. 설문해자에 ‘士(사)’는 ‘事(사)’라 설명하고 공자의 말을 인용하여 十(십)에 一(일)을 합한 것이라 했다. 즉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깨우친다는 의미와 열 명 속에서 뛰어난 한 사람이란 뜻도 동시에 갖는다. 여기에는 이미 집단적 개념이 들어가 있다.
 
단옥재는 “일(事)을 처리함에 있어 재능이 뛰어난 사(士)람이다”고 했다. 또 고힐강은 고서에서 “‘士’는 사오(士伍)라 했다”고 했다. 즉 ‘士’는 집단을 뜻한다. 진한시대에는 군인의 호칭인 ‘십오(什伍)’가 ‘사오(士伍)’이고 대장은 ‘원사(元士)’인데 칭호를 생략하여 ‘사(士)’라 한 것이다. ‘士’는 집단적 개념이 들어간 개념이다.
 
초기 ‘士’는 생업에 충실하다 유사시에는 전쟁에 출정하는 주민조직과 군대조직이다. 점차 전쟁이 빈번하자 전문적인 무사를 양성하고 중간 계층의 무사가 관직에 진출하게 된다. 무사는 평민계층에서 분화된 새로운 계층이다. 춘추전국시대에 나타난 사(士)계층은 초기에는 무사집단이다. 그 후 문무가 분리되면서 각자 전문성 있는 방향으로 발전한다. 무사집단에서 용맹함과 무예가 출중한 영웅들이 배출되어 그들은 정예병이 되어 사회적 지도층으로 도약한다. 이들이 국사(國士)가 됐다. 국사집단의 출현은 무사가 협사로 변화하는 중간적 성격을 가진다. [좌전. 성공 16년] 진나라와 초나라가 언릉에서 전쟁을 했다. 진나라 장수는 초나라 군대에 국사가 있기 때문에 당해 낼 수가 없다는 기록이 있다. 선진시대의 교사 현량ㆍ준사ㆍ재사 등의 직책은 모두 국사를 나타낸다. 전쟁이 빈번해지자 통치자들은 강제적으로 국사를 선발하게 된다.

공자도 무사에서 문인으로 인생항로를 바꾼 것이다. 즉 무인 계급이 먼저 지배층에 있다가 후에 문인 계급이 등장한 것이다. 상류 귀족이 독점했던 하상주 시대의 예악문화를 공자로 인하여 예악을 전문으로 종사하는 ‘사(士)’가 출현한 것이다. 이것을 보면 ‘예’가 동양문화의 최상위 개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동이족이 ‘예’의 나라였다는 기록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는 스스로 잘 새겨 보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된 것은 염과 황의 판천 전쟁과 황제와 치우의 탁록 전쟁 이후 중원의 질서가 무너지고 예ㆍ악 문화가 뿔뿔이 흩어졌기 때문이다. 오래전부터 계승되었던 예ㆍ악의 순서와 절차들이 파괴되고 위계질서가 무너져 천자와 제후의 예가 지켜지지 않고 뒤죽박죽됐다. 동이족 출신인 공자는 이를 안타깝게 여겨 왕관학문의 정수인 동이족의 ‘예악문화’를 다시 살려 체계적으로 복구하기 위해 ‘예악’의 문화부흥운동을 한 것이 유교의 실체다. 이것은 서양의 르네상스 부흥운동과 같은 것으로 당시로서는 커다란 사상의 전환적 사건이었다.
 
정치적 안정을 중시한 통치자들이 문을 중시하고 무를 경시하면서 ‘유(儒)’는 제도권에 들어가지만 소외당한 무사는 ‘유협(遊俠)’이 되어 중화에 새로운 사회적 계층인 ‘유(俠)’가 출현하게 된다. 한비자는 “검을 가진 자로서 개인을 위해 충성을 다하는 자객을 협(俠)이라 한다”하여 ‘협(俠)’이라는 개념을 처음 사용한 이후 ‘검협(劍俠)’이란 개념이 후대에 사용된다. ‘俠(협)’의 개념은 묵가로 인해 급성장한다. 묵가의 우두머리를 ‘거자(鉅子)’라 한다. 묵자는 자신을 희생하여 남의 위급함을 돕는 임협사상(任俠思想)을 철저히 실천하여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아무 조건 없이 남의 어려움을 돕는 것이 협객들의 행위 준칙과 같은 것이었다. 중국의 무협영화를 보면 이러한 형태를 잘 표현하고 있다. 묵자들은 전쟁의 어려움을 통해 엄격한 준 종교적 집단의 성격을 가진 유사(遊士)들이다.
 
여 씨 춘추에 묵가의 ‘거자(수장)’인 맹승이 초나라 귀족 양성군을 위해 죽음을 택하자 맹승의 제자 서약이 스승보다 먼저 벽에 머리를 부딪쳐 죽는다. 이때 83명의 묵가들이 죽는다. 이후 묵가를 추종하고 모방하는 사상이 급속히 중화에 퍼지게 된다. 춘추말기에는 전문자객이 출현하기도 했다. 무사들이 권신 귀족과 친분을 유지하면서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죽음을 불사한 것이다. 이때의 진의 예양, 오의 전제, 요리의 유명한 자객에 대한 일화가 사기의 자객열전과 오월 춘추에 기록돼있다.
 
무사는 집단의 개념이 있다. 무인은 무사 집단에 소속된 개인이란 의미를 내포 한다. 제도권의 무사에 편입되지 않고 민가에 남아 묵가 사상과 결합되어 남의 어려움을 돕는 의로운 행위를 한 무사들이 협객(俠客)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검을 숭배했기 때문에 ‘검협(劍俠)’이라 불렀다. 무인이라 함은 모름지기 검을 수련해야 진정한 무사협객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고려 광종(925~975) 때 956년 후주인 쌍기(후주 태조의 치하에서 절도순관, 장사랑, 시(試) 대리평사 등을 지냈다)의 발탁으로 유교가 들어와 사의 개념이 본격적으로 들어온다. 그러나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등의 기록에 따르면 사의 개념과 같은 무사집단이 이미 삼국에 있었다. 고구려의 조의선인과 신라의 화랑도와 국선 풍월주 등이 그것이다.

어원의 흐름으로 보면‘무사’의 순서를 바꾸면 ‘사무’가 된다. 고구려의 무사 집단이라 주장하는‘사무랑’의 음가와 일본의‘사무라이’와 무사의 속성이 똑 같은 것이 예사롭지 않다. 이에 대한 연구도 향후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 위 내용은 본보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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