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예는 나의 길’ 1976년 첫 도장을 열다!(2편)

대한호국무예합기도협회 유선종 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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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진 기자
기사입력 2014-05-31 [10:24]

▲대한호국무예합기도협회 유선종 총재© 무예신문

가정형편이 어려워진 만큼, 진로를 수정했다.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취업을 위해 용산공고에 진학했다. 당시만 해도 공고를 가는 친구들이 많았다. 나 역시도 평소 공고가 좋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던 것은, 버스를 한번만 타면 집에서 학교까지 갈 수 있다는 점이었다. 학교 성적은 괜찮았다.

고등학교 2학년 시절, 나는 당시 관장님 제안으로 체육관에서 부사범 생활을 하게 됐다. 3단 단증을 갖고 있을 때였다. 잘 가르칠 수 있을까 걱정도 됐지만, 누군가를 가르치는 게 체질에 맞았다.

내 마음 한켠에 한 가지 걱정이 생겨났다. ‘고등학교 졸업 후 무엇을 하고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었다. 며칠을 고민한 후, 이내 현실적인 방안을 찾아냈다. 육군사관학교 진학을 목표로 삼은 것. 나는 곧 공부를 위해 학원을 끊었다. 운동을 중단하지는 않았지만, 나름 열심히 공부했다. 학교, 도장, 학원, 집을 오가며 목표를 이루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육군사관학교 시험에서 나는 끝내 고배를 마셨다. 이때 만약 합격했다면, 지금의 내 인생은 상당부분 달라져있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이즈음, 사당동에서는 운동을 마친 유단자들이 범죄예방에 나서게 됐다. 당시만 해도 이곳에는 수재민들과 철거민들이 많이 살았다. 침입이 쉬워 오히려 도둑이 많았다. 도둑들은 이들의 숟가락까지 훔쳐갔다. 참으로 지독했다. 좀도둑이 많다 보니, 운동하는 사람들이 나서주길 바라는 요청이 왔다.

지금과 달리, 유단자가 많지 않던 시절이었다. 고등학생 신분으로 방범대 활동을 시작하게 된 이유다. 가장 어린 내가 직접 조를 짰다. 우리는 3인 1조로 움직였다. 방법대원 1명에 유단자 2명이 동네를 순찰했다. 어느날인가 도둑을 만나게 될 것이라 생각해, 도둑을 만나면 어떻게 잡을까를 고민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도둑과의 인연은 없었다.

 
▲ 혈혈단신 산에 들어가 무예 삼매경에 빠졌을 당시(1982) © 무예신문

고등학교 졸업 직후, 나는 입대를 자원했다. 지난 1974년 1월, 강원도 양구에서 군생활을 시작했다. 운동한 경력이 큰 도움이 됐다. 대대병력들을 대상으로 태권도를 가르쳤고, 장교들에게는 합기도를 사사했다. 이때 나는 합기도 5단 단증을 갖고 있었다. 마치 물 만난 물고기 마냥 군대생활이 적성에 맞았다. 격구대표로 대대 대항전에 나가 우승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수행하는 등 운동으로 부대의 명성을 높였다.

제대 직후, 체육관을 오픈하기로 마음먹었다. ‘반드시 성공하고야 말겠다’는 결심을 하고, 어떻게 하면 성공도장을 열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했다. 도장 개소 후 성공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TV출연을 결심했다. 당시 주말 인기프로그램이었던 ‘묘기대행진’과 ‘나의 비밀의 문’에 몇 차례 출연해 대중에 얼굴을 알렸다. 합기도를 선보였는데, 인기가 상당히 좋았다. 합기도 호신술 중 부채술이 특히 큰 이슈를 모았다.

1976년 12월 6일, 마침내 봉천동에 첫 도장을 열었다. 강남권이라는 지명을 담아 ‘남서울체육관’이라고 명명했다. 도장 이름만으로도 위치를 가늠하고, 찾아올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TV 출연으로 이름을 알린 덕에, 처음부터 도장 운영은 상승세를 이어갔다. 관원생은 대략 120여명 정도에 이르렀다.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지금도 그때의 기억은 잊을 수가 없다. 간판이 걸린 도장을 보자, 참으로 감개무량하고, 왠지 스스로가 대견했다.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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