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기도와 아이키도는 아주 딴판이죠."

대한민국덕암류합기유술총본부 김윤상 도주

가 -가 +

조정현 기자
기사입력 2011-06-29 [17:04]

최용술 도주의 합기도를 잇고 있는 김윤상 3대도주는 인삼으로 유명한 충남 금산에 은거하고 있다. 1934년생이니 우리 나이로 78세지만 아직도 사범을 따로 두지 않고 직접 후학들을 지도하고 있다. 도장 이름은 스승의 이름을 딴 용술관이다.
 

■ 정부에서 합기도를 외래무예로 분류하고 있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선생님이 일본에서 (배워)오셨으니 외래무예라고 해도 제가 할 말은 없죠.”

담백한 대답이다. 뭐라고 덧붙일 법도 한데 그걸로 그만이다.
 
■ 최용술 도주가 정말 일본에서 다케다 스승에게 배웠느냐를 의심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  “그걸 증명할 게 없어요. 애초에 제대로 된 문서를 받은 것도 아니고, 해방 후에 고향인 충북 황간으로 가려다 그나마  있던 짐마저 모두 잃어버렸으니.. 그 바람에 대구에 주저앉았어요. 선생님이 돌아가기 직전에 병석에서 다케다 선생을 보고 싶다고 합디다. 그래서 내가 ‘그렇게 학대받으셨는데 그분이 보고 싶으십니까?’ 하니 선생님 왈, ‘그분만 보고 싶다.’고 하십디다.”

최용술 도주는 일본에서 수년간 입산수련할 당시, 스승인 다케다 쇼가쿠로부터 온몸에 피멍이 들도록 혹독한 가르침을 받았다. “부엉이같이 생긴 다케다 선생이 너무 보기 싫어서 잠을 잘 때 죽여 버리고 싶은 충동을 숱하게 느꼈다.”고 술회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최 도주는 거친 학대 속에 사제의 정이 짙게 흐르고 있었음을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느꼈던 모양이다. 다케다는 유술(柔術)은 물론 검(劍)에서도 대가였다. 그는 최 도주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일본에서 검술은 내가 최고요, 맨손 기술은 네가 으뜸이다.”
그런데 최용술은 임종을 앞둔 다케다로부터 놀라운 말을 듣는다.
“네가 조선인으로 설움을 많이 겪고 고생이 많았다마는 내 조상도 한국인이다. 내가 네게 가르친 이 무술은 한국에서 건너온 것이다.”
다케다의 대동류유술은 일본으로 건너간 신라의 후예 신라삼랑 원의광(新羅三郞 源義光)이 시조다. 그의 무술이 다케다 가문에 전해져 중시조격인 35대 쇼가쿠에 이어지고, 다시 조선인 최용술에 전해진 것이다.

“다케다 선생의 집에는 ‘대동류합기유술 신라삼랑 원의광’이라는 현판이 걸려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신라삼랑이 뿌리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대동류는 다케다 가문의 비전(秘傳)무술로 전해지다가 일본의 2차대전 패망에 임박해 국민들의 단합을 위해 공개함으로써 일반에게 보급됐습니다. 그전에는 아무도 몰랐어요.”
 

■ 지금 지도하는 술기는 그때 그대로입니까, 아니면 변화가 있습니까?

⇒ “선생님이 가르쳐 주신대로 가르치고 있어요. 순서도 그대로요. 합기도에 대해 이런저런 논란이 많으니까 날더러 아예 창시자가 되라는 말도 있었지만 거절했어요. 선생님한테 배운 근거가 있는데 그럴 순 없죠. 그런 차원에서 ‘덕암류 합기도’ ‘덕암류 합기유술’이란 명칭들을 특허등록 해놓긴 했습니다.”

덕암은 최용술 도주의 호다.
 
■ 일본 아이키도(合氣道)협회에서 한국에 합기도 명칭을 쓰지 말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덕암류를 아이키도나 대동류와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 “아이키도하고는 아주 딴판이죠. 거기 하고는 길이 아주 멀고요. 얘기할 것도 없어요. 대동류는 같은 점이 조금 있지만 달라요. 깊이도 다르고.. 대동류는 기본동작이 118가지인데 선생님은 기본술기가 500수가 넘어요.”

아이키도는 대동류합기유술에서 파생된 무술로 일본인 우에시바 모리헤이가 창시했다. 대동류에서 아이키도, 합기도, 그리고 유도가 파생됐다. 아이키도 창시자 우에시바는 다케다에게서 대동류를 배웠다. 최용술 도주와 아이키도 창시자인 모리헤이가 처음 조우한 것은 1915년 홋카이도 아사히카와에서였다. 1913~1917년에 스승 다케다와 함께 일본전역을 순회하던 중이었다.
 
■ 그렇다면 한국의 합기도는 아이키도가 아니라 대동류합기유술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 “그렇죠.”

김윤상 도주는 또다시 짧게 대답한 뒤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합기도와 아이키도가 서로 상관이 없다는 걸 가장 잘 증명할 수 있는 역사적 증인의 단호한 증언처럼 들렸다.
 
■ 어떻게 최용술 도주의 제자로 입문하게 됐습니까?
⇒ “1973년 4월에 서대문에서 통합대회를 할 때 거길 갔다가 선생님을 본 거요. 그때까지 지한재 선생이 최고인줄만 알고 있었는데 선생님을 보고 깜짝 놀랐죠.  선생님을 뵙고 나서 ‘이왕 배울 거 선생님한테 가야겠다’ 마음먹었어요. 나중에 (협회에)선생님 주소를 물으니 이상한 소리를 해요. 선생님 돌아가신지 2년 됐다는 겁니다. 선생님 뵌 지 몇 달 안 됐는데 돌아가신지 2년이라니 얘기가 틀리잖아요. 그래서 내가 ‘여보쇼, 왜 사람을 그렇게 말하시오. 들어가서 사진 보시오. 선생님하고 찍은 단체사진에 나도 있을 거요.’ 그랬죠. 주소도 모르고 무조건 보따리 싸서 대구로 내려갔어요. 그렇게 선생님을 찾아서 (수련)했어요. 협회에서는 선생님(의 존재)을 속이고 있더라고. 멀쩡히 살아 계신 분을 돌아가셨다고.. 가서 보니까 선생님이 도복 입고 운동을 가르치고 있는데. 인간적으로 도리가 아니죠. 오늘날 돌아보면 한 50년 흘렀는데, 물론 그분들이 한국합기도를 발전시킨 공로는 인정합니다만, 하여간 그때부터 (협회와 관계를)딱 끊어버렸습니다.”

그렇게 김윤상은 최용술의 문하로 들어가 그의 무맥을 잇게 됐다. 내용상 격한 감정이 드러날 법한 대목도 있었지만 그는 간간히 미소도 지으면서 시종 낮은 톤으로 즐겁게 대화하고 있었다.
오래전 일인 탓인지, 이것이 충청도 스타일인지, 원래 그의 성정이 그러한지, 이도저도 아니면, 오랜 수련으로 감정을 다스릴 수 있어서인지 그 이유는 알 수 없다. 어쨌거나 대담자는 그가 이런저런 질문에 성의껏 답변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고 있다.
 
■ 합기도가 여러 모로 어려운 상황입니다. 합기도 발전을 위해 한 말씀 해주시죠.
⇒ “다들 조금씩 마음을 비워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있습니다. 가끔 합기도 대회에 가보면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이 있어요. 생활이 걸린 문제이니 그걸 나쁘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무예계의 장래를 봐서는 이원화를 해야 합니다. 한 틀 속에서 대회용과 수련용으로 나누어 운영해야 합니다. 지난 정부 때 청와대를 몇 번 다녀왔는데, 그분들이 그럽디다. 한국에 무술이 1000가지가 넘는데, 80~90%가 최용술 도주의 술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다른 건 몰라도 술기만큼은 잘 하더니 못 하더니, 선생님 술기를 그대로 배우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만큼은 통합이 되면 좋겠죠. 낙법이니 발차기니 대련이니, 이런 거는 하더니 말더니..”
 
그러면서 잠시 생각하던 김윤상 도주가 덧붙였다.

“선생님이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내가 죽고 없으면 전부 자기가 (엄지손가락 세우며)이거라고 할 거다. 그렇지만 어느 (정도)세월이 가면 내 얘기를 할 거다.’ 이렇게 말씀하십디다.”
 
이제 최용술 도주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가 온 것일까? 너무 많은 문제로 인해 도무지 해결책이 보이지 않을 때 모든 일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 될 수도 있다. 거리가 멀어서 서로 관계없는 것처럼 보이는 나뭇가지들도 알고보면 뿌리는 같다.
 
 
무예신문 (http://mooye.net/)  
조정현 기자의 다른기사보기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스토리 band naver URL복사
URL 복사
x

PC버전 맨위로 갱신

Copyright ⓒ 무예신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