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견사 탐구]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와 친일파의 극명한 택견의 해석차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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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만 무예연구가
기사입력 2019-08-27 [10:54]

▲ 前 서울대학교 스포츠과학연구소 연구원, 무예연구가 김영만     ©무예신문

전혀 다른 두 시각은 지금까지도 상존하고 있으며, 무예와 놀이로서 그 경계와 정체성이 모호하여 논란의 여지를 주고 있다. 어떤 운동이건 무예이건 간에 순기능이 있는가 하면 역기능도 없지 않다. 하지만 역기능만을 부각시켜 통용이 된다면 진실을 호도하는 것이다. 이러한 일제 잔재의 이론적 근거를 그대로 인용하여 택견을 비하하는 현실에 안타까울 따름이다. 안자산과 신채호의 주장처럼 택견은 무예로서 분명한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일본은 우리무예를 금지시키는 대신에 가라데, 검도, 유도 등의 일본식 무도를 장려하여 우리의 무예사상을 말살하고 대신에 일본의 무사도를 주입시킴으로써 우리의 민족정신을 일본에 종속시키는데 이용하였다(안용규, 2006).

 

이렇듯 택견은 일제강점기 ‘택견 탄압’ 정책에 의해서 금지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컨대 일제강점기의 신문을 보면, 각종 무도대회는 劍柔道 또는 柔劍道를 위주로 하였고 한국의 놀이로 취급하는 궁도(弓道)와 씨름(角戱) 유희(遊戱)를 위주로 하였다(동아일보, 1933년 4월 15일자)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일본 무덕회의 설립으로 메이지28년 10월 25일 제1회 무덕제(武德祭) 개최 이후 지속적으로 열리면서 한국에서도 무덕제 武道大會가 개최되었다(동아일보, 1938년 3월 31일).

 

지금까지 발굴된 기록에 1928년 7월 3일자 동아일보(5면)의‘仁川武道盛況’기사에서 인천무도관창립에서 단 1번 택견이 경기에 출전한 것으로 확인할 수 있다.

 

반면 한국의 궁도와 씨름은 쉽게 당시 무도대회의 종목으로 참가한 기록을 찾아볼 수 있는데 왜 택견이 종목에 포함되지 않은 것일까 하는 의문점을 가지게 된다. 안자산은 조선무사영웅전 무예고(武藝考)에 택견을 수록하고 씨름을 제외시킨 반면에 민속놀이가 수록된 세시기(歲時記)에는 택견이 빠져 있는 대신 씨름을 수록하고 있는데 이는 씨름과 택견이 공간적 ․ 시간적으로 같은 배경을 공유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에 무예와 놀이의 구분이 있었고 택견을 무예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말한다(김상철, 박범남, 1997). 특히 위에 언급한 仁川武道盛況’기사에서는 택견이 권투선수와 맞붙을 정도로 이종격투기의 면모를 지니고 있었을 것이다.

 

택견의 사전적 의미를 살펴본 결과, 일제강점기 이전에는‘手足’을 모두 사용하다고 기록된 반면 일제 강점기 민족문화말살정책에 의해서 택견이 ‘발차기’라는 의미로 변화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일제는 조선을 식지민화한 후, 조선 민족 말살 정책에 따라 민족 동화정책(同化政策)을 실시하였다.

 

전기한바와 같이,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와 친일파의 극명한 택견의 해석 차이는 국수주의적 입장에서 바라본 독립운동가는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사용된 택견의 올바른 무예로서의 가치를 기록하고자 한 반면, 친일반민족행위자의 기록은 일제의 민족 동화정책에 따른 ‘택견탄압’이라는 입장에서 천한 것, 나약하고 미약한 것이라는 존재로서의 택견을 기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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