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견사 탐구]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와 친일파의 극명한 택견의 해석차이(1)

가 -가 +

김영만 무예연구가
기사입력 2019-08-02 [20:56]

▲ 前 서울대학교 스포츠과학연구소 연구원, 무예연구가 김영만     ©무예신문

일제강점기 택견을 기록한 안자산의 <조선무사영웅전(朝鮮武士英雄傳)>(1919)과 신채호의 <조선상고사(朝鮮상고사)>(1948) 등은 국수주의적 성격을 가진 독립운동가인 반면, 최영년의 <해동죽지(海東竹枝)>(1925), 이능화의 <조선해어화사(朝鮮解語花史)>(1930),  최남선의 <조선상식문답(朝鮮常識문답)>(1947) 등은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분류되어 있다.  

 

안자산은 <조선무사영웅전>(1919) 무예고(武藝考)에 “근래에도 청년들이 씨름보다 소이(小異)한 박희(搏戲)를 행함이 있던 바 소위 택견이라는 것이 그 종류다. …석전을 열새양방의 군중이 상대로 작대하여 전투를 개시할새 그 전투는 2인 혹은 3인이 대립하여 '두발낭성', '딴죽'등의 유술을 쓰고...”라고 택견을 무예로 인식하고 있다.  

 

그리고 안자산은 동아일보(1930. 4. 3) ‘奇絶壯絶하든 朝鮮古代의 體育’의 제목 하에 “柔術은 人體의 筋肉의 三處血脈을 摶하야 死키도 하고 暈(훈, 晕)키도하고 啞(아)키도 하는 바의 三法이 있으니 그 例는 下圖과 가타 古記錄에 써잇는 것과 다름 업는 것이다. - 중략 - 近來에도 靑年들이 씨름보다 小異한 搏戱(박희)를 行하든바 所謂 『택견』이라 한 것이 그 種絡이다.”라고 무예로 기록하고 있다. 

 

신채호는 감옥에서 《조선일보(朝鮮日報)》(1931.6.10.~10.14)에 〈조선사〉라는 제목으로 연재하고 사후 출간된 <조선상고사(朝鮮상고사)>(1948)에 “태조왕 때에 와서 해마다 3월과 10월 신수두 대제(大祭)에 모든 군중을 모아 혹은 칼로 춤추며, 혹은 활도 쏘며, 혹은 앙감질도 하고, 혹 덕견이(택견)도 하며…”, “신수두 단전(壇前)의 競技會에 뽑힌 선배(先人, 仙人)들이 수박(手搏), 격검(擊劍), 사예(射藝), 기마(騎馬), 덕견이, 앙감질, 씨름 등 각종 기예(技藝)를 하며,”라고 택견을 무예로 기록하고 있다.

 

최영년의 <해동죽지(海東竹枝)>(1925)의 탁견희(托肩戱)에서 “이것으로 원수를 갚거나 애첩을 내기하여 빼앗기도 하는데 관에서 법으로 금지한 이래 지금은 이런 놀이가 없다.”이는 택견의 어원에서 빼놓을 수 없는 약방에 감초와 같은 기록이다. 그런데 최영년은 골수 친일파이다. 최영년은 법으로 금지하여 택견이 없어졌다고 기록하지만 동아일보(1928. 7. 3.)에 ‘仁川武道盛況’에 각종 무도시합이 있었는데, 최종 경기에서 택견의 권충일과 권투의 나주연을 인기 있는 선수로 꼽았다.

 

그리고 이능화의 <조선해어화사(朝鮮解語花史)>(1930)의 “우리나라 풍속에서는 만약 미동이 하나 있으면 여러 사람들이 질투하여 서로 차지하려고 장소를 정해서 각법(脚法), 속칭 택기연(擇其緣)으로 싸워 자웅(雌雄)을 결정지어 이긴 자가 미동을 차지한다. 세속에서는 이것을 급기롱(給寄弄)이라 한다. 조선조 철종(哲宗, 1849~1863 재위) 말년부터 고종(高宗, 1863-1887 재위) 초기까지 이 풍속이 대단히 성하였으나 오늘날에는 볼 수 없다.”라고 하였다. 이 기록은 역대 기생들의 역사와 실상을 밝힌 책이다. 택견을 비하하는 형태로 기록하고 있다.

 

또한 최남선이 《매일신보》(1937.1.30.~9.22) <조선상식(朝鮮常識)> 제목으로 연재한 것을 문답형식으로 기록한 최남선(1890~1957)의<조선상식문답(朝鮮常識問答)>(1947) 풍속편에 “택견은 본래 무예의 일종이었으나 차츰 술자리의 여흥이 되고 아동들의 놀이로 변화하였다”고 서술하고 있다.

 

택견관련 내용에서 최영년은 중국의 4대 미녀 중 한 명인 초선을 통해 연회를 기록하고 이능화는 기생과 관련된 내용, 최남선은 술자리의 여흥으로 서술하고 있다. 택견이 호전적이고 진취적인 모습이 아닌 놀이로서 기생과의 연관성을 가지는 등 풍류성만을 부각시키고 있다.

 

이는 택견을 바라보는 전혀 다른 시각이 친일파와 국수주의의 극명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일제강점기를 거쳐 오면서 왜곡되고 고착화된 시각은 아직도 일제의 잔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대로 답습하여 준거인 양 버젓이 인용되고 있다.

김영만 무예연구가의 다른기사보기

관련기사


    Warning: Invalid argument supplied for foreach() in /home/ins_news3/ins_mobile/data/ins_skin/o/news_view.php on line 81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스토리 band naver URL복사
URL 복사
x

PC버전 맨위로 갱신

Copyright ⓒ 무예신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