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기원 개혁, 회사후소(繪事後素)의 자세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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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기 회장
기사입력 2019-05-20 [12:17]

▲ 한중지역경제협회 회장 이상기 (무예신문)

외국인들에게 가장 인상적으로 남는 한국의 이미지가 김치, K-POP, 태권도라는 데에 이견을 다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문재인 정부가 100대 중점 과제의 하나로 체육 분야 중 유일하게 ‘태권도의 10대 문화콘텐츠화’를 선정했을 만큼 태권도는 한국을 대표하는 스포츠인 동시에 문화콘텐츠다.

 

더욱이 최근 남북 화해 협력 무드가 이어지면서 남한 중심의 세계태권도연맹(WTF)과 북한이 주도해온 국제태권도연맹(ITF)의 협력은 태권도 종주국으로서 단일 대오를 이룬다는 점에서 비정치 분야의 협력 모델로서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이렇게 중요한 시기에 세계 태권도의 두뇌이자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국기원 세계태권도본부의 역주행을 보노라면 자못 위기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최근 수년간 국기원 지도부와 태권도계의 추문이 국내에서의 사회적 지탄은 물론 외신에까지 대서특필돼 국제적 망신을 사는 등 태권도 종주국의 위상과 신뢰에 먹칠을 했기 때문이다.

 

‘투자의 귀재’로 유명한 워런 버핏 버크셔헤서웨이 회장은 “명성을 쌓는 데에는 20년이 걸리지만 명성을 망치는 것은 5분이면 충분하다”고 했다. 국기원의 위상과 브랜드 이미지가 지금 딱 이런 지경에 처해 있다.

 

그간 한국인이 맡아온 WTF 총재 자리가 현 총재의 임기가 끝나는 2021년을 마지막으로 유럽이나 중국 등으로 바뀔 가능성이 큰 상황이다.

 

중국에서 만난 태권도계 인사의 말이 예사롭지 않다. 그는 “한국이 태권도의 발원지는 맞지만 종주국은 아니다”고 했다. 따라서 세계태권도의 본부인 국기원의 역할과 위상 재정립 및 글로벌화를 위한 개혁이 시급한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국기원을 중심으로 한 태권도계는 최근 3-4년 새 각종 비리와 승부 조작, 지도자 간의 파벌 싸움, 해외에서의 영향력 악화 등으로 홍역을 겪고 있다. 이는 스포츠이기 이전에 무도(武道)로서 예의범절과 공명정대함, 상호 공경과 존중 등을 최대의 가치로 여겨온 태권도의 이미지에도 크나큰 손상을 초래했다. 그 결과 국기원의 위상마저 흔들리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세계 태권도의 본부인 국기원은 종주국이자 세계태권도연맹의 회장국으로서 상징적 영향력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태권도 단증(certificate)을 발급하고 관리하는 실질적 행정 콘트롤 타워다. 그만큼 실질적 영향력이 큰 기관이다.

 

하지만 국기원과 태권도계의 잇단 추문이 이런 위상을 흔들고 있는 게 문제다. 국기원의 독점적 단증 발급에 불만과 이의를 제기하면서 국가별 발급체제로 개편하려는 움직임이 주요 국가들을 중심으로 잇따르면서 세계 태권도계가 크게 술렁이고 있다. 하지만 국내 태권도계의 결속력과 도전받고 있는 국제적 위상 회복이라는 이중 과제를 안고 있는 국기원의 대처는 미흡하기 짝이 없다. 지금까지 하던 대로 해서는 현재의 위기 상황을 타개할 수 없다.

 

침몰 직전에 놓인 국기원이 방향타를 신속하게 미래지향적으로 돌리며 정상화 작업에 박차를 가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국기원의 역할과 위상에 대한 정의를 다시 내리고, 그에 맞게 인력을 배치해야 한다는 것이다. 상당수 전문가들은 국기원 이사장과 국기원장의 역할부터 미래지향적으로 다시 규정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사장은 약화된 국기원의 국제적 위상을 되살리고 태권도 국제화에 힘을 쏟을 수 있는 비태권도인 국제전문가를, 원장은 태권도인 출신으로 내부 결속을 다질 수 있는 인물이 맡아서 이원화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얘기다.

 

그러자면 국제적인 전문성과 고단자로서 존경받는 인품을 갖춘 인재를 영입해야 하는데 현재로선 이런 움직임이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

 

대다수의 태권도계 인사들은 “도장의 인연, 학연, 지연을 유지하고자 하는 기득권 세력들의 밀실 운영이 위력을 발휘하여 왔던 점을 이번 기회에 태권도계가 반드시 짚어봐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1980년대까지 일본을 대표하는 국기(國技) 스포츠였던 유도가 그랬던 것처럼 태권도도 ‘세계화의 역설’을 경험하고 있다. 세계화가 진전될수록 종주국의 위상은 약화되고 있다. 태권도의 무도 정신은 갈수록 사라지고 경기용 태권도에서도 위상이 흔들리는 게 현실이다. 올림픽에서 퇴출될 위험도 여전히 남아 있다.

 

태권도계는 그동안 무도인 태권도를 경기화해서 이른 시일 내에 전 세계에 알렸다. 이로써 일본의 카라테, 중국의 우슈를 극복하고 글로벌 영향력을 확보했다. 하지만 너무 경기 위주로 흐른 나머지 여러 가지 문제점도 안게 됐다. 스포츠 경기 위주의 단선적인 접근법에서 벗어나 종주국 무도 본부로서 국기원의 역할은 명확하다.

 

더 큰 문제는 비즈니스 마인드 부족이다. 경기 단체가 주축인 ‘태권도 판’에서 태권도의 산업적·경제적 가치를 극대화할 시장 중심의 아이디어가 나올 리 만무하다는 것이다. 중국 소림사가 해외 MBA 출신으로 국제 비즈니스에 탁월한 스융신 스님을 주지로 영입한 뒤 세계적인 관광지로 거듭난 사례를 눈여겨봐야 한다는 전문가들의 지적에 귀 기울여야 하는 이유다.

 

국기원이 단증 발급 같은 기존의 사업 외에 태권도가 한국을 대표하는 글로벌 문화콘텐츠로서 산업화할 수 있도록 새로운 역할 정립이 시급하고 절실한 상황이다.

 

경영과 지도의 분리를 위한 제도적인 개선, 경기용 스포츠와 무도로서의 태권도가 혼재하는 상황에서 과감히 벗어나 국기원이 세계 태권도 본산으로서의 위상과 권위를 회복하려면 고단자에 대한 예우를 강화하고 단증 발급 체계를 투명화 하는 등의 국제적인 신뢰도 제고 노력이 필요하다.

 

태권도는 세계 206개국에서 1억여 명이 수련하는 세계인의 무도다. 그에 걸맞은 세계적인 위상을 가지려면 그 본부인 국기원의 대(大)변신이 필요하다.

 

세계 태권도인들의 정신적인 중심이 되려면 지덕체(智德體)를 아우르는 태권도 본연의 무도 정신으로서 세계적 위상을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세계 어디서나 학교마다 동네마다 설립돼 있는 태권도장들이 태권도의 정신적인 중심지가 되어야 한다. 태권도장은 태권도의 저변 확대는 물론 문화 콘텐츠로서 태권도의 전진기지라는 관점에서 접근하는 게 바람직하다.

 

정부가 국기원 정상화를 위해 태권도계 외부 인사를 망라한 ‘국기원장 및 이사 선발위원회’ 구성을 추진 중이라는 소식은 그런 점에서 반갑다. 국내 태권도 4대 단체의 하나로서 국기원의 역할과 나아갈 방향은 명확하다.

 

​무도로서의 태권도를 겨루는 국내외 종합대회 육성, 세계 각국 고단자에 대한 정책적인 관리, 태권도의 산업화와 관광자원화, 전통무예 및 인문 정신과 태권도를 결합한 한류콘텐츠 개발 등을 통해 태권도를 세계 무도의 중심 종목으로 육성해야 한다.

 

또한 태권도의 국제적인 표준화 작업, 태권도 용품의 글로벌화 및 한류 상품화를 위한 연구 개발을 앞으로 국기원이 해야 할 과제로 조심스럽게 제시하고자 한다.

 

현재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미래를 제대로 설계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실패를 다시 돌아봐야 한다. 논어(論語)에 보면 겉으로 꾸며진 형식적인 아름다움보다는 내면의 아름다움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뜻의 ‘회사후소(繪事後素)’라는 말이 있다.

 

‘그림을 그리는 일은 하얀 바탕이 있는 뒤에 할 일이다’라는 뜻으로, 아무리 훌륭한 붓을 갖고 있고 그림 실력이 좋다 해도 하얀 바탕의 종이가 없으면 아름다운 그림을 그릴 수 없다는 의미다.

 

​변화하지 않으면 도태된다. 오래 가기 위해서는 다시 새로운 판을 짜야 한다. 국기원이 국제적인 위상과 종주국의 권위를 회복하고 확대하려면 과거의 타성(惰性)에서 벗어나 과감히 변화하는 길밖에 없다.

그러면 통렬한 자성과 함께 외부의 조언에 겸허히 귀를 기울이고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 마지막 기회다.

 

※ 외부 필진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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