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견사 탐구] 석전(石戰)과 매질꾼(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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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만 무예연구가
기사입력 2019-05-03 [16:04]

▲ 前 서울대학교 스포츠과학연구소 연구원, 무예연구가 김영만     ©무예신문

녹동생(崔湖東)의 기사에서 시골노인 이야기에서 택견과 봉(작대기)에 관한 언급이 다음과 같이 나온다.

 

‘노인의 이야기를 들은 즉 옛날에 원래 편전(편쌈)이라 하는 것이 양각법(楊脚法)『견』과 같이 작대기(봉)을 쓰는 일종의 무예 연습을 하는 것으로써 처음에는 정직과 또 의협을 위하더니 사람들의 인심이 차고 낮아지더니 서로 살상하기만 위주로 하는 돌을 몰래 던지고 몽둥이로써 뜻하지 않게 저격을 하니 이는 원래 본뜻이 아니요. 일종의 나쁜 짓거리도 아닌 어지러운 전쟁이라 하며 한편으로 아프게 바로잡으며 세상의 풍속을 말하며 한편으로 오랜 풍속의 순박한 풍속을 말하더라.’

 

매질꾼 선수들은 남의 눈에 띄기 좋게 일부러 나막신을 신기도 했고, 월남긴 옷이라는 별칭이나 각기 특색 있는 복색은 조선시대의 제한된 왈자들의 일부가 차려입는 복색이다. 왈자들은 검계의 전통을 따라 하기도 했는데,“낮에는 자고 밤에 돌아다니고, 안에는 비단옷을 입고 겉에는 낡은 옷을 입으며, 맑은 날에는 나막신을, 궂은 날에는 가죽신을 신는다니, 일상적 행위를 철저히 뒤집는 일견 저항의식의 소산으로 여겨진다”(강명관, 2004).

 

왈자들의 일부 복색은 매질군에게도 영향을 미쳐 조금 특이한 행색을 하기도 했다. 그들 모두가 행한 택견은 현재 알려지고 있는 택견과는 조금 다르게 손발 모두를 자유롭게 썼으며 격투라는 표현처럼 제한된 규정이 크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즉 폭력과 살상이 난무하는 석전판에서 인명을 직접 살상하는 전쟁무기 사용을 금지하는 극히 제한된 규정 이외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군인들도 택견을 하고 왈자들도 택견을 했는데, 당연히 일반인도 했을 것이다. 송덕기옹만 해도 군대에 입대했지만 축구를 즐겼고 후에는 황학정에서 국궁을 했다. 군대에서는 사병들에게 뜀틀과 철봉 등의 근대식 체조를 가르치기도 하였고 불교축구 선수단에 선수 생활을 하기도 했다(박범남, 1999). 후에 택견으로 크게 알려지지 않았다면 택견과 연관 짓기 어려울 것이다. 송덕기옹만 해도 그런 상황이었으니 다른 이들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매일신보(1921.1.31.)에 실린 ‘와우산 아래에서 석전을 보고‘ 기사에서 ’택견과 봉을 쓰는 일종의 무예 연습을 하는 것으로써’ 라는 당초의 취지와 맞게 하급군인들에게도 필수적으로 행해졌지만 다른 한편 싸움꾼이나 왈자들이 행하는 기예로 변질된 점이 주요인인 듯하다.

 

이에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반상(班常)계층의 존재이기도 했지만 문화적으로 볼 때는 석전이라 하겠다. 유교의 엄격한 관례와 주자가례는 조선시대에 있어 모든 백성들의 규범이었지만 도리어 그 엄격함 때문에 한꺼번에 해소시킬 해방구가 필요하였던 것이다. 그 역할을 석전이라는 방법을 통해 해소하였기에 양면성이 드러나는 것이다. 하급무관과 왈자들에게서 행해진 택견도 같은 범주에 속한다.

 

즉 택견이 더 과거에는 선군(選軍)에 있어 과목 중의 하나이기도 했으면서도 조선말에 이르러서는 하급무관이나 포졸들도 하지만 동시에 왈자들도 성행하는 이러한 풍조는 활발히 성행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록에서 배제되는 계기가 되었다. 석전은 사회적 이슈가 되는 대상이었기에 일부 기록이 남았고 택견은 크게 이슈가 되지 않았으므로 기록에서 소외된 점도 간과하기 어렵다.

 

※ 외부 필진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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